성폭력 가해 아이들 ‘왜곡된 가치관’ 바로잡는다

 

 

성문화센터 치유 사례

 

 

 

 

"눈앞이 캄캄했어요.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요. 엄마가 우실 때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 거 같더라고요."

집단 성폭행에 가담한 적이 있는 성훈이와 동수, 호원(이상 가명·17)이는 지난해 여름의 그 사건을 떠올리는 것조차 싫은 듯 모두 고개를 떨궜다. 단 한 번의 잘못된 행동이 자신은 물론 가족의 삶까지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걸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뒤늦은 후회

 

지난달 20일 서울 영등포동 '아하!청소년성문화센터'에서 만난 이들은 하나같이 앳된 얼굴에 울긋불긋 여드름이 솟아 있었다. 이들은 다른 친구 2명과 함께 지난해 8월 인터넷 채팅사이트에서 만난 여중생 한 명을 꼬드겨 유원지로 놀러갔다. 술을 마시며 친해진 다음 이 여중생을 차례로 성폭행했다. 일주일 뒤 '사건'이 들통나면서 경찰서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껏 살면서 가장 길게 느껴진 1년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당황한 동수는 무작정 집을 나와 이틀 동안 찜질방, PC방을 전전했다. 호원이는 "사건이 발각돼도 부모님한테 몇 대 맞을 줄 알았지 감옥에 갈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회상했다. 아이들은 모두 특수강간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법원에서 판결이 나기까지 꼼짝없이 겨울방학을 구치소에서 보내야 했다.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3년씩을 선고받았다. 보호관찰 2년과 성폭력 재발방지를 위한 성교육 수강명령 80시간이 조건으로 붙었다.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됐지만 성폭행범이라는 꼬리표가 평생을 따라다니게 됐다.

아이들은 지난 여름방학 때 '아하!청소년성문화센터'에서 마지막 성교육 40시간을 받았다. 동수는 '낙태 비디오'를 보면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깨달았고, 성훈이는 성폭력 피해·가해자 역할극을 통해 피해 여학생의 심정을 이해하게 됐다.

"밑바닥까지 갔으니 이제부터라도 잘해야죠." "제 인생에 흠집이 생긴 거니까 노력해서 어떻게 해서든 메울거예요."

절절한 후회와 반성이 묻어났다. 성훈이는 "공무원이 되고 싶었는데 못하게 될 것 같다"면서 "인생에서 바닥을 쳤으니 이제부터 올라오면 된다"고 겸연쩍게 웃었다.

 

 

◇왜곡된 성 가치관이 문제

 

아이들은 뉘우치면서도 한편으로 피해 여학생에게 책임을 일부 떠넘기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호원이는 "피해 여학생에게 상처를 준 건 맞지만 '강제로' 성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고 항변했다.

같은 달 25일 충남 천안교육청 위(Wee)센터에서 만난 중3 성폭행 가해학생들도 비슷한 태도를 보였다. 태호(가명·15)는 자신의 행동을 깊이 뉘우친다면서도 "걔(피해 여학생)도 잘못이 있는 거 아니냐"고 했다.

이는 자신들의 미래가 성폭행사건에 저당잡혔다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불만일 수도 있지만 전문가들은 왜곡된 성 가치관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피해 여학생에 대한 뼈저린 반성과 미안한 마음이 없다면 시간이 흐른 뒤 같은 범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고정애 아하!청소년성문화센터 책임상담원은 "상당수 성폭력 가해 학생들은 '상대도 원했다' '반항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올바른 성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으면 단지 여성을 '정숙하거나 정숙하지 못한 사람' 두 가지로만 나눈다"며 "성폭행 재범률을 낮추려면 이성의 감정을 존중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성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길자 천안교육청 위센터 전문상담교사는 성의 자기결정권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의사표현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피해를 줄이는 방법이라고 제시했다. 집단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들을 만나보면 의외로 심성이 여리거나 순진한 학생들이 대부분이라는 것. '가해 학생이 윽박지르니까 반항할 수 없었다' '(가해 학생이) 여러 명인 데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 거절하기 어려웠다'는 식의 진술이 많았다. 이에 대해 한 교사는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는 똑부러지게 '싫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 교사는 특히 성폭력 사건을 완전히 극복하려면 부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제 아이들은 부모와 대화를 통해 마음이 많이 움직였다고 털어놓았다. 호원이는 "그동안 한번도 엄마와 성(性)에 대해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고, 감추기 급급했다. 그런데 대화해보니까 이해가 쉬웠다"고 말했다. 성훈이는 "아빠와 이야기하며 자기 행동에 책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며 "뒤늦게 후회가 됐다"고 말했다.

한 교사는 "자녀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성 지식을 터득하도록 이야기해주는 것이 좋다"며 "올바른 성 인식이 자리잡으면 아무 생각없이 성폭력을 저지르는 일은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역설했다.

 

천안=백민정 기자 minj@kmib.co.kr

 

 

[출처- 국민일보 2009.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