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잔혹한 성폭행사건이 발생한다. 언론은 우리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도록 가해자를 극악무도한 악마로 묘사한다. 그 악마는 가난에 찌들고 음란물에 중독되어 성욕을 통제하지 못하는 구제불능자이다. 성난 여론은 정부를 압박하고, 정부는 이 사회에 다시는 그런 악마가 출현하지 못하도록 화학적 거세 확대 등 온갖 궁여지책을 내놓는다. 심지어 새누리당 모 의원은 물리적 거세 방안까지 국회에 제출한 상태다. 그러나 가해자의 잔혹함과 성급한 방지대책만 난무할 뿐, 성폭행 피해자가 실제로 사건으로 인해 어떤 정신적 충격을 겪으며 살아가는지에 대한 관심은 많이 부족해 보인다.
피해자의 관점에서 성폭행을 연구한 캐시 윙클러는 사건 속에서 가해자는 피해자를 철저히 물건으로 취급하고, 그것이 피해자의 자아를 파괴한다고 말한다. 는 "성폭행으로 인해 스스로가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제거되면 우리 존재는 생명유지 장치를 달고 있는 몸뚱이가 되고 만다"고 강조한다. 즉, 피해자는 성폭력의 그 순간에 '사회적 살인'을 당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트라우마는 피해자가 가져왔던 세상을 향한 신뢰를 산산이 조각내어 피해자를 끝없는 불안 속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이것은 피해자와 세상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한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너무 쉽게 지나친다. 언론의 시선도 주로 가해자의 흉악함이나 공권력의 무능함에 머물러 있다. 가해자를 둘러싼 환경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피해자가 겪는 직접적인 아픔마저 등한시한다. 이제 성폭행 피해자의 삶에 눈을 돌려, 그들의 아픔에 진실한 위로를 건넬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대책 마련에 급급하고 있을 동안에 그들은 무관심 속에, 차마 잊을 수 없는 성폭행의 기억을 가지고 죽음과도 같은 삶을 하루하루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